올림푸스 PEN, 추억을 포기하다

새로나온 것들 2009/06/18 18:02 Posted by 자그니

사람은 누구에게나 원초적 기억이 있다. 그건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처음 접해서 익숙해진 것들의 기억이다. 내게 처음으로 욕망을 일깨워 준 것들. 첫번째 음식, 첫번째 연애, 첫번째 싸움, 첫번째 관계 ... 그 처음으로 겪었던, 모든 기억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내게도 첫번째 카메라에 대한 기억이 있다. 처음으로 뷰파인더를 보고, 촛점을 맞추고, 찰칵, 셔터를 눌렀던 기억이. 그래, 내 카메라에 대한 원초적 기억은, 바로 아버지가 쓰시던 펜탁스 MX 였다.

 

 

하지만 사실, 이 카메라로 사진을 입문한 것은 아니었다. 펜탁스MX로는 그저 찍어봤을뿐, 그 카메라를 내가 만지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대신 내게 쥐어진 것은, 초등학교 졸업선물로 받은 삼성 카메라 윙키.

...그러나 그것만으로, 나는, 카메라가 있는 학생이었다. 사진을 찍을 자격을 갖게 된 것이다.

펜탁스MX가 온전히 내게 온 것은 고2때였던 것 같다. 아버지가 쓰시지 않던 그 카메라를, 내가 몰래 집어들고 나와버렸다. 그리고 그때부터 MX는 나와 함께 했다. 내게 주어진 것은 후지필름 현상소에서 주던, 16페이지짜리 얇은, 사진 잘찍는 법이란 팜플렛 하나 밖에는 없었지만, 그것이면 내겐 충분했다.

그러다 야시카의 새로운 카메라를 장만하게 되고, 잠시 펜탁스MX는 내게서 잊혀졌다. 잊어버렸던 펜탁스MX에 대한 욕망이 되살아났던 것은, 영화 월드 오브 투모로우를 보고나서였다.

영화의 여자 주인공이 들고 있었던 것은 구식 RF 카메라의 변형된 모델. 그리고 그 안에 남겨져 있던, 단 한장의 필름. 그 화면 속에서, 잊고 있던 옛 기억이 되살아났다. 한롤당 24장의 한정된 제약이 주는 매력.

 

 

필름을 선택하고, 카메라에 끼우고, 피사체를 찾고, 좋은 구도를 미리 잡고서는, 가볍게 누른다. 그때 손끝이 떨리는 맛, 가볍게 느껴지는 셔터의 저항감, 그리고 찰칵하고 셔터가 올라갔다 내려가는 소리.

하지만 세상은 이미 변했고, 필카로 바꾸기엔, 너무 세상에 길들여져 있었다. 혹시나 그 맛을 찾을까-싶어서 올드한 스타일의 디카를 찾아헤매봤지만, 맘에 드는 것은 엡손의 RD-1 하나밖에 없었고, 그 카메라는 정말, 너무너무 비쌌다.

...그러다 어제, 올림푸스 신제품 발표회에서 올림푸스 PEN EP-1 을 만났다. 처음에 디자인을 보자마자 그래, 이거야-하고 속으로 소리쳤다. 올드 카메라에 대한 향수가 없는 사람은 그 기쁨을 모를 거다. 예전 그 디자인이 다시, 내 손에 들릴 수 있다는 기쁨을.

 

 

하지만 그뿐이었다. 화질도 양보할 수 있다. 이 카메라가 크다고 말하는 사람은, 예전에 카메라를 손에 쥐어본 적이 없는 사람일거다. 이 카메라는 정확히 올드 카메라의 디자인과 손맛을 재현해주고 있었다.

그래, 손.맛.을.재.현.해.주.고.있.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17mm 렌즈와 14-42 줌렌즈가 함께 발매되는 것도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가장 좋았던 것은 가죽 케이스. 인체공학적인 카메라 바디에는 절대 적용하기 힘든 물건. 이거야말로 올드 카메라의 로망 아니던가...

그렇지만, 결국, 거기서 끝났다. 아니나 다를까... 너무 비쌌다. 일본에서의 가격으로 추정해 보자면, 렌즈 포함 킷이 120만원 정도가 될 가능성이 높다. 잘 사시는 분들이라면 모를까, 가난한 내가 사기에는 적당하지 않다.

...추억 하나를 위해 100만원 넘게 투자할만큼 나는 여유가 있지 않다.

이 카메라의 타겟은 어떤 면에서는 매우 분명하다. 20대 후반 30대 중반, DSLR은 너무 불편하고 그래도 좋은 카메라는 사고 싶은, 고소득 여성이다...; 아니면 남과 다른 스타일리쉬함을 추구하는 남성이던지.

어쨌거나 모던함 보다는 레트로한 감각을 더 좋아하는, BOBOS 스타일의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펀샵-정도는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소득을 가진. 그리고 그런 라이프스타일을 동경하는 워나비들이 구입할 카메라.

예전 올림푸스 PEN 처럼, 누구나 간편하게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카메라가 되어주진 못할거다. 많이 팔렸다-라는 얘기를 들을 수 있을지 어쩔지는 모르겠다. 그건 앞으로, 전적으로 마케팅의 힘이다.

어차피 기존의 DSLR 구입자들에게 어필하기엔 가격이 많이 쎄다. (서브 디카는 비싸도 60만원 정도가 한계다.) 그렇다고 입문자가 구입하기에도 마찬가지고... 결국 매니악한, 스타일을 중시하는 사람들만 구입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내겐, 100만원을 주고 추억을 구입할 만한 여유가 없다. 만고불변의 진리 가격 대 성능비를 따지는 내겐, 도저히 구입할 카메라가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디자인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서, 조금 많이 아쉽다. :)

 

 

  1. 스마일맨 2009/06/18 19:41 답글수정삭제

    저는 펜삼이를 쓰는데...
    아직도 너무 좋아요 ^^
    Pen ep-1 한번 써보고 싶네요 ^^

  2. [블로거 간담회] 아쉬웠던 행사. 예뻤던 올림푸스 PEN(EP-1)...

    Tracked from 라디오키즈@LifeLog 2009/06/18 19:49

    올림푸스가 DSLR과 컴팩트 디카 사이에 새로운 틈새를 만들 모양이다. 최근 그들의 야심작이자 마이크로 포서드를 내세운 작고 예쁜 카메라 EP-1(통칭 PEN)을 내놨기 때문이다. 2009/06/16 - DSLR이 부담스러운 당신을 위해... 올림푸스 E-P1 PEN은 DSLR의 크기와 무게 때문에 휴대를 버거워하는 이들과 필름식 수동 카메라의 아련한 추억을 가진 이들, 클래식한 스타일을 좋아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등장한 카메라로 DSLR처럼 렌즈를..

  3. 윤태 2009/06/18 22:10 답글수정삭제

    와, 저 추억의 필카!!!
    한때 저도 저거 들고 엄청 뛰어다녔다능!!!
    ^^
    잘봤어요..

    • 자그니 2009/06/19 09:49 수정삭제

      저 카메라를 들고 열심히 뛰어다니셨다면.. 지금쯤은 내공이 장난 아니시겠네요...ㄷㄷㄷㄷ

      저에겐 저 카메라를 쓰던 시절이 가장 그리운 시절중의 하나랍니다. 생각해보니...

  4. splash9 2009/06/19 15:35 답글수정삭제

    작년에 목업이미지가 인터넷상에 돌때부터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던 카메라였습니다.
    디자인은 약간 변경됬지만, 그럭저럭 넘어갈만하게 나왔구요.
    근데, 화질이 절망스럽더군요.
    생각을 완전 접었습니다. 포서드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졌던건지, 혹여 기대감이 너무 컸던건 아니었나 싶습니다.

  5. 조랑 2009/07/09 22:55 답글수정삭제

    이거..바디가 70만원대, 17미리 렌즈 포함이 90만원대인가 100만원쯤으로 나왔던데요?

    초기 정발가가 그 정도라면 조금 기다리면 사정권으로 들어올지도..

    저는 포서드 포맷이 이래저래 별로여서 생각 없지만요...=_=a

  6. 신개념 디카 신제품 - 올림푸스 펜 E-P1 , 터치샷디카 Z300, Fuji Finepix Real3d

    Tracked from ★ Link's Another Side, Another Story 2009/08/06 21:44

    눈여겨볼만한 신개념 디카 신제품 올림푸스 펜 E-P1, 터치샷디카 Finepix z300, Real3d >> 올림푸스 펜 E-P1 아시다시피 올림푸스의 E-P1입니다. 마이크로포서드방식으로 미러를 없애 DSL(R)임에도 불구하고 작은 디자인이 가능해졌죠, 사이즈는 하이엔드디카급, 그렇지만 성능은 DSLR급이라는 매력적인 성능덕분에 많은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제가 볼때는 괘 인기를 끌만한 모델인데 다만 아쉽게도 가격이 그리 저렴하지는 않은것 같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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